[공공뉴스] 지난 1월6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일군의 남자 노인들이 몰려왔다. 대한민국 어버이 연합이었다. 그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향해 아베의 사과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아울러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종북 단체라고 매도했다.

이 기막힌 장면을 보면서 뜬금없이 영화 <300>을 떠올렸다. 페르시아 100만 대군에 맞서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켰던 스파르타 300 용사의 이야기. 영화적 재미를 위한 과장이 정말 많이 보태졌지만, 스파르타 300 용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운 것만은 어김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초인적 용기를 발휘할 수 있게 한 것일까?

▲ 서울 종로구 중학동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이 일본대사관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스파르타인들은 그리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외친다. 그런데 과연 자유라는 추상적 가치만을 위해 한 인간이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의 목숨을 그토록 기꺼이 쉽게 내던질 수 있었을 것인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 그 마음이 결사를 감행했던 초인적 용기의 진정한 원천이었을 것이다.

스파르타인은 용기를 두려움이 없는 것,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용기가 불명예와 수치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다고 믿었다. 고대적 관점에서 보면 남성 전사로서 적의 칼날로부터 자신의 아내와 가족, 더 나아가 동족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명예이고 수치였을 것이다.

남성 중심적 시각이란 점 인정하고 과거에도 이것 때문에 비판받은 적 있다. 내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아버지들의 역사로서, 불명예와 수치심으로 다가온다. 무척이나 가부장적 심성이다. 머리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정서가 심성 구조 깊숙이 박혀있다. 그래서 난 어쩔 수 없이 아직도 계몽되지 않은 한국의 아저씨, 가부장인 것이다.

그런데 화가 나는 것은 이런 심성조차 한국 사회에서는 일부만이 가진 것처럼 느껴질 때이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기존 지배구조의 변혁을 수용할 때의 주요 동기는 지배자로서의 자존심, 명예심, 그리고 수치심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 동참했던 귀족들 상당수가 처음부터 자유주의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좋은 귀족, 좋은 지배자로서 지배의 합리화를 꿈꿨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해서 시야가 점점 넓어지며 세상을 귀족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존재 기반 위에 서있음을 느끼면서 이로부터 불명예와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의 합리화를 꿈꾸면서, 합리성 자체에 몰두하게 되면, 지배의 합리화가 아닌 지배 그 자체를 문제시하고 뛰어 넘으려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땅의 아버지들은 진실로 몰염치했다.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들에게 전부 다 밀어놓고 빈둥대며 수틀리면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이런 추악한 기억들을 여러 집안의 할머니들에게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장원윤 자유기고가

이런 악습은 지배계급에게 배운 것일테다. 농민들의 등을 쳐 먹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풍류를 구가하던 몰염치한 양반지주들의 악덕이 피지배계급의 농민 남성들에게 전이된 것이고, 최근의 남초 사이트를 보면,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우리 사회의 방식, 여기에는 본래의 문제를 뛰어넘는 정말로 많은 함의들이 담겨 있다.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국 사회가 여기서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불명예와 수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인간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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