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미투:고질적 병폐 성폭력 수면위→용기가 만든 폐쇄적 조직문화 변화 바람

[공공뉴스=김소영 기자] # 대학 4년제 체육학과에 다니는 A씨는 지난해 말 새로 부임한 B코치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학생을 외모에 따라 A급, B급으로 나눠 부르는 것은 기본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에 대한 차별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 더 큰 문제는 B코치가 자세를 고쳐주겠다는 이유로 은근슬쩍 허리를 쓰다듬거나 목덜미에 입술이 맞닿는 등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 그 감촉이 소름끼치게 불쾌하고 싫었지만 B코치가 업계에서 유능하고 좋은 이미지를 구축해 왔던 터라 어느 누구에게 쉽사리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더욱이 체육계는 다른 영역보다도 쉽게 사건 은폐가 가능한 구조인 만큼 혼자 어찌할 방도가 없는 상황. 그렇다고 몇 년 동안 체육계에 몸 담아온 A씨는 섣불리 다른 진로를 찾을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지위와 권력을 이용한 성폭력이 사회 문제로 확산되고 있지만, A씨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저 참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신유용 페이스북 캡쳐>

최근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가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가운데 전 유도선수 역시 고교 재학 당시 유도부 코치에게 수년간 성폭행 피해를 입은 사실을 고백해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해 사회 전 영역에서 미투 열풍이 휘몰아칠 때 유독 스포츠 분야는 조용했다. 선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코치와 감독,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폐쇄적인 합숙소와 훈련장, 그리고 사고가 났을 때 묵인, 방조 심지어 공조하는 침묵의 카르텔까지.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나기에 최적화된 체육계 관행과 성문화가 이번 사건의 본질이다. 지금까지 스포츠계의 미투에는 무수한 미(Me)만 존재하고 연대하고 지지하는 투(too)가 없었던 까닭이다.

어렵게 용기를 낸 심 선수의 고발이 한국스포츠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 이목이 쏠리면서 스포츠계 미투가 들불처럼 번져 체육계에 더 이상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뿌리 뽑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체육계 미투(#Me too) 바람 불까

최근 체육계에서 ‘미투 운동’이 확산하는 가운데 고교 시절 지도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전직 운동선수가 나왔다.

전 유도선수 신유용씨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고교 재학 시절 유도부 코치로부터 수년간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신씨는 영선고 재학시절인 지난 2011년 여름부터 고교 졸업 후인 2015년까지 영선고 전 유도부 코치 A씨로부터 약 20차례 성폭행을 당했다.

심지어 A씨는 이 기간 신씨가 임신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산부인과 진료를 받도록 강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해엔 A씨가 “아내가 의심한다”라며 신씨에게 50만원을 주고 성관계 사실을 부인하라고 회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씨는 돈으로 회유하려는 A씨의 모습을 보고 지난해 3월 서울 방배경찰서에 고소했다.

이와 함께 세계적인 성폭력 저항 운동 ‘미투’ 열풍이 일던 지난해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자신이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지난해 11월 “현재 사건은 수사 촉탁으로 인해 시한부 기소중지가 이뤄졌으며 서울 중앙지검에서 피의자 관련 수사가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라며 “이번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추후 말씀드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신씨의 주장은 최근 쇼트트랙 심 선수가 조 전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뒤 재조명되고 있다.

성폭행 의혹을 받는 코치는 해당 매체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성폭행한 적이 없으며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조 전 코치의 성폭행 혐의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오는 18일 조 전 코치에 대한 첫 피의자 조사를 진행한다.

조 전 코치는 심 선수를 비롯한 쇼트트랙 선수 4명을 상습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현재 수원구치소에 수감 중인 상태여서 경찰의 이번 조사는 구치소 접견 조사로 이뤄진다.

경찰은 이번 조사에서 그간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성폭행 혐의를 추궁할 방침이다.

앞서 심 선수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14년부터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2달여 전까지 조 전 코치로부터 수차례 성폭행과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이 담긴 고소장을 지난해 12월 중순 경찰에 제출했다.

다만 조 전 코치 변호인은 “심 선수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혐의를 부인하는 기존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경찰은 고소장 접수 이후 조 전 코치로부터 압수한 휴대전화와 태블릿PC 등 디지털 저장매체와 심 선수가 제출한 휴대전화에 담긴 내용 등을 살펴보기 위해 디지털 포렌식 작업을 하는 등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처럼 조 전 코치가 성폭행 혐의로 추가 고소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은 분노했다. 이에 따라 심 선수 등 쇼트트랙 선수들을 상습 폭행해 법정 구속된 조 전 코치에 대해 엄벌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 지난달 18일 ‘조재범 코치를 강력처벌해주세요’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청원에 20만명 이상이 동의했다. 이로써 청와대의 공식 답변 요건을 채웠다.

청원인은 “선수들의 삶이 파괴됐다”며 “이번 기회에 승부 조작, 뇌물, 폭행, 비리 모조리 털고 가지 않으면 국민은 스포츠 자체를 외면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조 전 코치와 대한빙상경기연맹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이 15일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이사회에 참석해 체육계 폭력·성폭력 사태에 대한 쇄신안을 발표하며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이기흥 체육회장, 성폭력 공식 사과에도 사퇴 촉구 목소리 ↑

최근 조 전 코치 성폭행 의혹 사건에 이어 고등학교 유도선수 코치 성폭행 의혹 사건까지 피해자들이 얼굴과 실명을 걸고 피해를 호소하며 체육계 성폭력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대한체육회가 정부와 긴밀히 협조, 체육계 성폭력에 강력한 대책을 마련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15일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이사회에 참석해 체육계 폭력·성폭력 사태 쇄신안을 발표하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이 회장은 “앞으로 정부와 긴밀한 협의 하에 조직적 은폐나 묵인·방조 시에 연맹을 즉시 퇴출시키고 지도자들이 선수들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며 이를 무기로 부당한 행위를 자행하는 것을 뿌리 뽑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계기로 빙상연맹을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심층 조사하고 엄중하게 그 책임을 물어 관리감독의 최고 책임자로서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하고 정상화시키는 데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철저히 쇄신하겠다”며 “그 실행 방안으로 성폭력 가해자를 영구 제명하고 국내외 취업을 완전히 차단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메달을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온정주의 문화를 철폐하고 전수조사 결과에 따라 사법처리 대상을 검찰 고발하도록 의무화 하겠다”며 “은폐 등 조직적 차원의 비위 단체는 회원 자격을 영구히 배제하고 단체 임원까지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은폐 등 조직적 차원의 비위 단체를 영구히 배제, 단체 임원까지 책임을 추궁토록 하고 홈페이지나 보도자료 등을 통해서 처벌과 징계 내역에 대한 공시를 의무화 하겠다”며 구체적인 사안을 밝혔다.

징계 정보 공유 체계를 구축하고 국내 체육단체 및 국가별 체육회와 국가올림픽위원회(NOC) 등과 협력 체계를 즉시 구축해 가혹행위와 성폭력 가해자가 국내외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엄정 조치할 계획이다.

아울러 여성 훈련 관리관을 채용하고 숙소와 일상생활 관리 체계를 전면 개편해 국가대표 선수촌 내에 선수 관리 체계를 바꾸는 한편, 선수촌 안에 인권상담센터를 설치하고 인권관리관과 인권상담사를 상주 배치하는 동시에 인권관리관에게 성폭력 피해자 보호 후견자 임무를 부여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주요 사각지대에는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보강하고 라커룸에 비상벨을 설치할 예정이다.

이 회장은 “성폭력 조사 및 교육을 외부 전문기관에 위탁 실시하고, 스포츠공정위원회·선수위원회·여성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에 인권전문가를 필수적으로 참여토록 하겠다”며 “성폭력 상담 전문기관 등과 양해각서를 맺어 선수·지도자·학부모 대상 교육을 연 2회 이상 정기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선수 육성 체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정부와 협의 하에 현재의 성적지상주의와 엘리트 체육 위주의 육성 방식에서 전면 재검토하고 개선안을 마련토록 하겠다”며 “합숙 위주의 훈련, 도제식 훈련 방식의 근원적 쇄신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체육계 시민단체는 성폭력 사건을 방관하고 방조했다며 이 회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문화연대, 스포츠문화연구소, 체육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는 이날 서울시 송파구 서울 올림픽파크텔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회장과 대한체육회가 체육계 성폭력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이 회장은 조 전 코치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체육계에서 반복돼 온 성폭력 사건을 방관하고 방조한 책임은 대한체육회에 있다”고 질타했다.

이어 “8일 대한체육회에서 ‘2018 스포츠 (성)폭력 실태자료’를 발표했는데 체육계 성폭력이 꾸준히 줄고 있다는 내용이었다”며 “사건 진상조사는 어떻게 진행했고 가해자에게 어떤 조치를 했는지, 보호자 조치는 어떻게 했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시민단체는 이 회장이 사실상 성폭력 사태를 방조했다며 사퇴를 요구했다.

이들은 “이 회장은 임기 초부터 보은 인사, 선수촌 탈의실 몰카 사건 등에 미온적으로 대응해 왔다”며 “성추행 혐의로 영구제명 된 지도자를 대한체육회 선수위원회 재심에서 3년 자격정지로 감경시키는 등 면죄부를 부여해 와서 논란이 됐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대한체육회와 이 회장에게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묻는 것은 체육계의 만연한 성폭력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될 것”이라며 “여성, 인권, 법률단체와 함께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운동을 전개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화연대와 체육시민연대 등 시민단체가 15일 송파구 올림픽파크텔 앞에서 열린 ‘체육계에 만연한 폭력·성폭력을 방관한 대한체육회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해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체육계 성폭력 부끄러운 민낯..정부, 강도 높은 쇄신책 마련 지시

한편, 정부도 체육계를 향해 강도 높은 쇄신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체육계의 잇단 ‘미투’ 움직임과 관련해 15일 “폭력과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은 체육계를 영구히 떠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총리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최강의 개혁 없이 체육계는 국민의 신뢰 위에 서있기 어렵게 됐다”며 이같이 언급했다.

그는 “종합적이고 강력한 비리 근절대책을 마련하라”고 관계부처에 주문했다.

이 총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에 대한민국의 체육의 미래가 걸려있다고 느낀다”면서 “대한체육회는 명운을 걸고 내부를 혁신해달라”고 당부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해서는 “감독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서 “문체부 내부에는 어떤 소홀함이 있었는지 점검하면서 교육부, 여성가족부 등과 함께 체육계의 고질적 병폐를 시정할 가장 확실한 대책을 마련하고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또 이 총리는 검찰과 경찰에 “두려움이나 수치심 때문에 피해를 덮고 지내온 선수들이 더 계실 것”이라며 “2차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하면서 법에 따라 철저히 수사하고 가장 강력히 처벌하라”고 강조했다.

전날 문재인 대통령 역시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드러난 일뿐 아니라 개연성이 있는 범위까지 철저히 조사·수사하고 엄중한 처벌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최근 연이은 체육계 폭력과 성폭력 증언은 스포츠 강국 대한민국의 화려한 모습 속에 감춰져 온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어 “외형 성장을 따르지 못한 우리 내면의 후진성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사·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보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하는 것”이라며 “그런 보장 하에 모든 피해자가 피해를 용기 있게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체육계의 성적 지상주의, 엘리트 체육 위주 육성 방식에 대해서도 전면 재검토하고 개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체육계는 ‘그루밍(grooming) 성범죄’의 온상으로 지적된다. 그루밍 성범죄는 친분을 활용해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한 후 성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뜻한다.

피해자와 신뢰를 쌓는 동시에 회유와 협박을 통해 피해자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성에 대한 관념이 명확히 자리 잡지 않은 미성년자가 피해자가 되기 쉬운 실정.

특히 스포츠 지도자는 경기출전권 등 선수생활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만큼 유소년 선수들은 성적과 경기를 빌미로 한 협박에 취약하다. 또 선수생명을 걸고 고발해도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태를 키웠다.

수년간 위계에 억눌리고 선수로서의 성공에 입김이 강한 코치에게 저항할 수 없는 ‘그루밍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독립적인 감시기구 신설과 더불어 체육계의 문화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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