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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명의 ,쉼표
[이상명의 ,쉼표] 예술은 그저 예술이다
이상명 기자 (114@00news.co.kr)  2019. 11. 13

[공공뉴스=이상명 기자] 최근 정치적 발언을 서슴치 않는 공지영 작가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뉜 가운데 공 작가에게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일부에서 작가의 정치적 견해와 작품을 연관지어 싸잡아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작품은 작품일 뿐 작가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예술적 결과물을 작가의 행동과 결부시키는 것은 작가의 예술적 깊이를 좁혀 결국은 그 작가를 통해 위로를 받고 공감을 얻었던 우리 자신의 손해로 다가올 것이다. 

영화 ‘은교’ 포스터 <사진출처=네이버 영화><br>
영화 ‘은교’ 포스터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어떤 작품이든 간에 미술작품이든 영화든 소설이든 작가에게 작품은 자식과도 같은 존재라는 말이 있다. 

영화로도 제작되며 큰 인기를 모은 바 있는 은교의 원작은 박범신 작가의 소설로 아마도 박 작가에게 소설 은교도 자식에 견줄 그런 존재였으리라. 

소설 말미에 적어 내려간 에필로그에서 박 작가는 주인공 은교에 대해 단순히 어린 여성에 대한 갈망으로 소설을 집필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지나가버린 옛 청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청춘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담긴 작품이라고 피력한 바 있다. 

은교가 영화로 개봉되고 사람들은 영화가 아닌 원작의 작가를 향해 비난을 했다. 어린 여고생을 대상으로 성적인 탐닉을 하는 내용으로 성도착증적 작품이라는 비난까지 가했을 정도니 작가의 마음에 상당한 상처가 됐으리라 짐작한다.

소설 은교가 발표된 후에는 그렇게까지 힐난받지 않았던 박범신이 영화가 개봉되자 각색된 영화의 내용까지도 덤터기 쓰며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았다. 가히 마녀사냥과도 같았다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기억할 정도.

원조교제라는 파격적 내용이 들어가 있지만 여타의 막장스토리와는 차별적인 독특함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은교를 가슴 속 깊이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시인 할아버지 이적요 때문일 것이다. 

이적요에게 은교는 단순히 어린 몸이 아니라 잃어버린 청춘이요, 젊은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주인공 적요 안에 박범신이 녹아있다고 말한다. 적요가 박범신이요 박범신이 적요라는 것. 

그래도 작품은 작품일 뿐 작가 자신이 작품 그 자체는 아니다.  

#영화 은교 VS 소설 은교 이야기 

원작 소설 은교를 읽기 전에 영화 은교만을 보았다. 단순히 영화로만 알고 본 작품이었는데 영화관람 후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원작 은교와 영화 은교는 다른 작품이다.

소설가의 집필 의도와 영화감독의 연출 의도가 완전히 달랐다고 나는 생각했다. 원작 소설이 ‘내가 보는 은교와 네가 보는 은교는 다르다’처럼 안개 같은 순수함이라면 영화 은교는 관능·본능·파멸이었다.
 
예를 들어, 여고생 은교가 서지우와 관계하며 한 대사 “여고생이 왜 남자랑 자는 줄 알아요? 외로워서, 외로워서 그래요. 나두” 라는 말은 원작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은교가 개봉되고 그 내용이 상당한 파장을 불러왔을 때 영화 기사에 달린 댓글 중에는 “무슨 특정 여고생 은교만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것이지 불특정 다수의 모든 여고생을 싸잡아 남자랑 자고 다니는 여자로 만들었다”며 원작 작가에 대해 맹비난하는 글도 있었다. 

영화는 영화를 제작한 감독의 몫이지 모티브가 된 소설의 작가 몫이 아니다. 영화와 원작 모두를 본 나로서는 둘은 판이한 해석을 불러왔다.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영화에서 은교와 서지우는 처음부터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원작에서 원조교제를 통해 이적요의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설정과는 다르다는 점.

그리고 은교에 대한 사랑을 갈망하며 이적요와 삼각 구도를 이루는 원작 속 서지우의 설정과 달리 영화는 은교로부터 이적요를 지키고 이적요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서지우의 끝없는 충정을 보여준다.
 
원작 소설보다 영화 은교는 아리송한 아이다. 자신보다 20살은 더 많음 직한 서지우를 흠모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소설 은교가 그저 생각 없이 용돈을 얻기 위해 원조교제로 서지우를 만나는 것과 달리 영화 은교는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어떤 동경 어린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사는 은교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향수였을지도 모를 은교의 그런 정서는 할아버지 이적요에게는 순수함으로, 서지우에게는 연모로 다가갔다고 느껴진다.

서지우가 사망하던 전 날 이적요의 집을 나서던 은교가 갑작스레 취한 서지우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한 것을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적요를 위험에 빠트린다며 힐난이나 하고 사사건건 못마땅해 하던 서지우와 은교의 정사장면을 감독은 무슨 의도로 넣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얻지 못한 나는 영화를 두 번이나 더 보고는 그것이 연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소설 은교에서 서지우는 번번이 스승인 이적요에게 대적하는 구도로 나온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끝없이 구애하며 끝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승을 대한다. 은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스승을 보며 연민과 함께 안타까움도 갖는다. 

오히려 스승인 이적요가 서지우를 향해 일침을 가하고 경고를 날리며 젊음에 대해 비웃는다.

‘젊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젊었다고 한들 네까짓 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 작품을 도둑질한 멍청이 주제에. 늙음은 죄가 아니다. 노인네는 잘못이 아니다’ 라며 항변하기도 한다.

젊은 서지우를 향한 이적요의 끝없는 질투는 끝내 은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젊음을 능욕한 대가로 살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한다. 

이처럼 원작 소설이 세 사람의 얽히고 설킨 복잡미묘한 감정 구도라면, 영화 은교는 서지우의 스승 이적요를 향한 일방적 구애·서지우의 젊음을 향한 이적요의 질투·한탄 그리고 끝내 아리송한 아이 은교이다.

시인 이적요의 지적인 모습에 매료되면서도 이적요는 순수한 남자의 상징이고, 젊은 서지우를 터부시하면서도 서지우는 이성으로서의 남자로 본 영화 속 은교.
 
영화 은교는 끝내 이적요의 곁을 떠난다. 그것이 영화 은교의 아리송한 모습이다. 반면 소설 은교는 할아버지 이적요와 오래도록 잘 지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이적요는 은교를 끝내 떠나보낸다. 마치 젊음아, 이제는 안녕하듯, 은교야 안녕.

같은 제목이지만 너무나도 다른 느낌. 소설 은교와 영화 은교

더는 영화 은교로 인해 원작 소설 작가에게 돌을 던지지 말았으면 한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넘나든 영화가 은교라면 소설 은교는 잃어버린 혹은 잊고 지낸 청춘에 대한 이야기다.

은교는 깊은 슬픔으로 쓴 소설이라는 박범신의 말이 어쩐지 아련하게 다가오는 가을이다.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 감독의 몫이며 작품의 논란이 일더라도 원작 소설가의 잘못이 아니다.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또 예술은 그저 예술로서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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