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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스토리
[공공story] 가면 뒤 숨겨진 얼굴
#그루밍 성범죄:감언이설로 심리적 약자 지배해 상습 성폭행·추행→처벌은 무겁게 보호는 철저히
김소영 기자 (114@00news.co.kr)  2020. 05. 28

[공공뉴스=김소영 기자] # 초등학교 저학년 딸을 둔 워킹맘 A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지난달 재택근무를 하면서 딸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동안 직장 때문에 딸과 제대로 놀아주지 못했던 A씨는 “엄마가 출근 안 하니까 너무 좋다”라는 딸의 말에 미안한 마음이 커지면서 진지하게 일을 그만둬야 하나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최근들어 더욱 확고해졌다. 뉴스에서 연일 나오는 흉흉한 사건·사고들 때문. 특히 잊을만 하면 터지는 아동 성범죄는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더욱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딸에게 사람들이 없는 곳에 혼자 있지 말고, 모르는 사람과 거리를 두라고 신신당부 하지만, 그러나 아직 심리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범죄 등 특정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는 게 현실. 더 큰 문제는 외동인 탓에 딸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유난히 사람들을 좋아했고 잘 따랐다. 딸의 이런 성격을 우려하며 A씨는 매번 “나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지만, “나한테 잘 해주고 착한 사람들이랑은 놀아도 돼?”라고 되묻는 딸의 질문에는 정확한 답을 해줄 수 없었다.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를 받는 전 유도 국가대표 왕기춘(32)이 구속기소됐다. <사진=뉴시스>

정보기술(IT) 발달과 온라인 채팅앱의 다양화로 아동·청소년을 유인하는 ‘그루밍’(grooming)이 쉽게 이뤄지고 있다. 그루밍은 본래 주인이 반려동물의 털을 손질하거나 몸단장하는 것을 뜻하지만 주인 마음대로 동물을 길들이는 행위에서 착안해 피해자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길들이기 성범죄’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특히 그루밍 성범죄자는 피해자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를 이용한다. 이 때문에 아동학대나 학교폭력의 피해자, 심리적 불안을 겪는 이들이 범죄에 노출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거나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서 신뢰를 쌓은 뒤 서로 비밀을 만들며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의존하도록 만든다. 피해자가 성적 가해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길들이고 피해자가 이를 벗어나려고 하면 회유하거나 협박하면서 폭로를 막기도 한다.

그루밍 성범죄는 피해자들이 보통 자신이 학대당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 표면적으로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한 것처럼 보여 수사나 처벌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 ‘미성년자 성폭행’ 유도 국가대표 출신 왕기춘 구속기소

그루밍 성범죄는 교사와 학생, 성직자와 신도, 의사와 환자 등 서열이나 소속감이 확실한 관계,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최근에는 자신의 체육관에 다닌 제자 2명을 상대로 그루밍 성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드러났다.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 유도 국가대표 왕기춘이 그루밍 과정을 거쳐 아동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전해지면서다.

최근 대구지검 여성아동범죄수사부(양선수 부장검사)는 미성년 제자를 성폭행한 한 혐의(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로 왕씨를 구속기소했다.

왕씨는 지난 2017년 2월 자신이 운영하는 체육관에 다니는 B(17)양을 성폭행하고 지난해 2월 같은 체육관 제자인 C(16)양을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지난해 8월부터 2월까지 자신의 집이나 차량에서 C양과 10차례에 걸쳐 성관계한 혐의(아동복지법 위반)도 받는다.

검찰은 왕씨가 전형적인 그루밍 과정을 거쳐 성적 학대를 한 아동 성범죄로 보고 있다.

대한유도회는 12일 왕씨를 영구제명하고 삭단(단급을 삭제하는 조치) 징계를 내렸다. 왕씨는 이에 대한 재심 신청을 하지 않아 20일 대한유도회에서 영구제명됐다.

왕씨가 미성년 제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것과 관련해 더불어민주당은 “사법부는 그루밍 성범죄 가해자를 엄중 처벌하라”고 촉구했다.

박성민 민주당 청년대변인은 22일 논평을 통해 “검찰은 왕씨가 전형적인 그루밍 성범죄를 저질렀다며 혐의를 특정했다”며 “사법부는 왕씨가 미성년 제자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성범죄가 단순한 성범죄가 아님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청년대변인은 “그루밍 성범죄의 특성상 가해자가 의도적으로 범죄 대상을 골라 친분을 만들고 피해자의 정신을 서서히 지배해 성착취를 저지르기 때문에 죄질이 극히 나쁘고 피해의 정도가 매우 크다”면서 “아동·청소년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내기 위해선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체계적 지원에 앞서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박 청년대변인은 왕씨 외에도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그루밍 성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가해자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특히 그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지난해 10월 대한민국에서 아동에 대한 성폭력과 학대가 여전히 만연하다며 심각한 우려를 표한 바 있다”고 했다.

이어 “더 늦기 전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악의 고리를 반드시 끊어내야 한다”며 “그루밍 성범죄와 같은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들을 일벌백계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어떠한 선처나 예외도 허용치 말고 왕씨를 단호히 처벌할 것을 사법당국에 강력히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사진=뉴시스>

# 디지털 그루밍 성범죄에 노출된 아이들

오래전부터 그루밍 성범죄는 심각한 수준에 있었다.

2017년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를 운영하는 청소년 지원기관 ‘탁틴내일’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4년 7월부터 2017년 6월까지 20세 미만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 상담 사례 78건을 분석한 결과 그루밍 성폭력이 34건으로 43.9%를 차지했다.

이중 대부분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아는 사이에서 발생했다. 가해자는 피해자 친구의 지인, 친부, 고모부, 학원 교사, 교회 교사, 고용주, 선배 등 다양했다. 

그루밍 성범죄가 늘어나는 데 비해 처벌 기준은 미미한 상태다. 그루밍 성범죄 성립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 

현행법상 13세 미만에 대한 성범죄는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가해자를 처벌하지만 13세 이상은 강제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처벌이 어렵다. 게다가 가해자가 피해자와 연인 사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n번방 사건 등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주된 수법으로 문제되고 있다. 이에 서울지방변호사회는 12일 ‘디지털 성범죄 관련 양형위원회 양형기준안 마련에 대한 의견서’를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제출했다.

서울변회는 “디지털 성범죄가 죄질이 불량하고 피해자의 피해가 물리적인 피해보다 훨씬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법원에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이 없어 솜방망이 처벌이 많았다”며 이에 대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양형기준에 대한 의견서를 작성했다.

서울변회는 의견서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는 법정형이 동일·유사한 다른 범죄에서 권고되는 형량범위보다 더 엄중하게 처벌하는 양형기준이 마련돼야 한다”며 “가해자의 범행동기와 가담경위, 범죄 수익의 정도 등을 감경요소로 고려함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가해자가 자신이 유포한 성착취 영상물의 삭제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등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피해회복이 양형기준에 반영돼야 한다”며 “이러한 노력 없이 단순히 가해자의 반성문 제출이나 관련 시민단체에의 기부 등이 감경요소로 손쉽게 고려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특히 서울변회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변회는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초기에 피해자에 대한 심리적인 지배(그루밍) 행위와 함께 이뤄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러한 사정을 고려한 양형기준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외에도 양형기준 가중요소로 유포를 용이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 가해자 행위와 범행 가담자 및 공범의 가담 행위를 꼽았다.

서울변회는 “의견서 내용들이 양형기준 마련 시 반영되기를 희망한다”며 “앞으로도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는 데 앞장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뉴시스>

# 그루밍 성범죄,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루밍 성범죄는 계획된 범죄다. 가해자는 비밀리에, 범죄를 지속할 방법을 계획한다.

이 때문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보호자의 보살핌이 덜한 피해자들을 고른다. 견고한 보호막이 있는 아이들은 범죄 대상에서 제외하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물망에 올리는 것이다.

미성년자는 성인보다 판단력이 약하기 때문에 그루밍 범죄에 쉽게 빠질 수 있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약점,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의존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상대방을 부모 혹은 연인처럼 느끼기도 한다.

이 과정에 다다르면 대부분의 피해자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이는 나이가 어릴수록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 더 어렵고 점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성추행으로 인식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그루밍 성범죄를 인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판단력이 미약한 미성년자들에게 예방법을 알려주고 스스로가 자신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도록 가정과 학교, 사회가 아이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해자의 행위가 범죄 행위임을 알게 해야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만약 피해자 본인이 성범죄에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주저하지 말고 즉각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 성범죄 사건의 경우 혼자만의 힘으로 대응하려 할 경우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원센터에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게 안전하다.

그루밍 성범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안전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경각심을 갖고 예방에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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