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부 낙태:여성 자기결정권과 태아 생명권 또 충돌→임부만 책임 떠안는 사회 문화 개선부터

[공공뉴스=김수연 기자] # 30대 중반 여성 김모씨는 대학 시절 한 번의 낙태 수술을 받았다. 21살 무렵 사귀던 남자친구의 아기를 임신한 김씨는 많은 산부인과에 문의했지만 생각보다 병원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100만원 가까이 되는 수술비용이 김씨의 발목을 잡은 것. 당시 남자친구가 수술비를 절반 가량 마련해준다고 했지만 갑자기 연락이 끊겼고, 결국 김씨는 학교도 휴학한 채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수술비를 마련했다. 자초지종을 말할 틈도 없이 급작스럽게 휴학을 한 탓에 김씨의 친한 동기들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김씨는 수술 며칠 후 친한 동기로부터 연락이 와 휴학을 하게 된 상황을 설명했고, 동기는 몸조리 잘 하고 복학하라며 김씨를 위로했다. 하지만 학교에 복학한 이후 같은과 동기는 물론 선·후배들도 김씨와 거리를 뒀고, 김씨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역시 휴학 전과 사뭇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진=뉴시스>
<사진=뉴시스>

낙태 찬반 논쟁에 또 다시 불이 붙었다. 정부가 임신 14주까지의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자 그동안 낙태죄 완전 폐지를 주장해 온 단체와 낙태를 반대하는 단체 모두 반발하며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 결국 유지된 낙태죄..임신 14주까지는 허용

정부는 지난 7일 임신 초기인 14주까지 낙태는 전면 허용하고, 사유가 있을 경우 최대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을 입법예고했다.  

이 입법예고는 지난해 4월 형법상 낙태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후속조치다. 

헌재는 올해까지 낙태죄를 개선할 것을 주문했으며 이에 법무부와 복지부 등 관계부처 공동으로 태아의 생명권과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실현을 최적화할 수 있는 법률 개정을 논의해 왔다고 정부는 설명했다. 

정부가 입법예고한 형법 개정안에는 기존 낙태 처벌조항에 허용 요건이 더해졌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임신 14주 이내에는 어떤 경우든 낙태를 할 수 있다고 허용한 것. 

현행 모자보건법에서는 ▲임부나 배우자의 우생학적·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 ▲강간·준강간에 의한 임신 ▲근친관계 간 임신 ▲임부 건강 위험 등 사유가 있을 경우에만 임신 24주 이내에 낙태를 허용하고 있지만 형법 개정안은 헌재 결정 취지를 충분히 반영해 임신 14주 이내에는 일정한 사유나 상담 등 절차 요건 없이 임부의 의사에 따라 낙태를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임신 15~24주 이내에는 기존 모자보건법상 사유 및 헌재 결정에서 명시한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도 낙태가 가능하도록 했다. 

낙태를 허용하는 절차적 요건도 형법상 명시됐다. 낙태방법은 ‘의사가 의학적으로 인정된 방법’으로 하도록 규정하고,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의 경우 상담 및 숙려기간을 거치도록 했다. 

모자보건법 개정안에서는 자연유산 유도약물을 허용해 낙태 시술방법의 선택권을 확대했다.

또한 중앙 임신·출산지원기관을 설치, 원치 않은 임신의 인지나 아동유기 등 위기상황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긴급 전화 및 온라인 상담 등을 제공하기로 했다. 

아울러 인공임신중절에 관한 의학적 정보 접근성 보장과 반복적인 인공임신중절 예방을 위해 의사에게 시술방법, 후유증, 시술전·후 준수사항 등 시술 전 충분한 설명 의무를 두고 본인 서면동의 규정도 마련했다. 

심신장애의 경우 법정대리인 동의로 갈음할 수 있으며, 미성년자는 보호자 동의 대신 상담사실확인서 등으로 시술할 수 있도록 했다.

만 16세 이상의 경우 미성년자가 법정대리인의 동의받기를 거부하는 등 불가피한 경우 상담사실확인서만으로 시술할 수 있으며, 만 16세 미만은 법정대리인의 부재 또는 법정대리인에 의한 폭행·협박 등 학대로 동의를 받을 수 없는 경우 이를 입증할 공적자료와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의 상담사실확인서 등으로 시술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의사의 개인적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 진료 거부를 인정했다. 대신 여성의 시술접근성 보장을 위해 의사는 시술요청 거부 즉시 임신유지 여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임신·출산 상담기관을 안내해야 한다. 

국가와 지자체는 피임교육 및 홍보, 인공임신중절 관련 실태조사 및 연구, 국민의 생식건강 증진사업 등을 추진한다. 

정부는 약사법 개정을 통해 형법과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하는 의약품에 대해 낙태 암시 문구나 도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해당 의약품의 안전사용 시스템 구축, 불법사용 방지 등 필요한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자연유산유도 의약품 허가를 신청받고 필요한 경우 허가 신청을 위한 사전상담도 추진할 방침이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처벌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기자회견을 열고 항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찬성도 반대도 정부에 ‘쓴소리’

정부가 이같은 내용의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자 그동안 낙태죄 전면 폐지 목소리를 높여 온 여성계와 일부 시민단체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23개 단체로 구성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8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이번 입법예고안을 규탄하며 전면 폐지를 촉구했다. 

공동행동은 “입법예고안은 여성 처벌을 유지하고, 보건 의료에 대한 접근성을 제약하는 기만적인 법안”이라며 “낙태죄를 형법에서 완전히 삭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동행동은 전날(7일) 성명에서도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형법 269조 1항과 270조 1항의 처벌 조항을 형법에 그대로 존치시키는 것으로 그 자체로 위헌”이라고 분노했다. 

이들은 “정부 입법예고안이 여성의 자기결정권 존중이라는 법개정 취지에 반하는 명백한 후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면서 “상담 등 절차를 통해 여성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해 자기결정권의 행사를 돕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낙태죄를 존치하고 임신중지를 각종 사유와 절차로 규제하고 억제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임신중지를 국가에게 허락받지 못하면 죄인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명백히 퇴행적인 개정안”이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새로운 낙인과 허용 기준이 아닌 임신중지를 필수 의료행위로서 공공의료 영역에서 보장하는법과 정책이 필요하다”며 “위기임신에 대한 예방 사업이 아닌 임신중지와 유지, 출산과 양욱 전반의 성과 재생산의 권리에 대한 지원 사업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법무부 양성평등정책 특별자문관인 서지현 검사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간통죄 폐지가 간통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듯 낙태죄 폐지가 낙태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서 검사는 “낙태죄가 두려워 낙태 않는 여성은 없다. 불법화된 낙태로 고통받는 여성만 있을 뿐”이라며 “실효성 없는 낙태죄 존치가 아닌 실효성 있는 제도와 정책으로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자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치권, 특히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정부의 입법예고안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잇따르고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정부 입법예고안은 현행 낙태죄 조항을 그대로 두고, 허용 요건 조항만 추가했다”며 “임신중단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고 임산부와 의사 모두 범죄자로 처벌하도록 하는 낙태죄 체제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이후 법안 발의와 심사를 통해 형법에서 낙태죄를 완전히 드러낼 것”이라며 “여성의 자기결정권 보장, 인공임신중단의 절차와 요건 등은 보건의 관점에서 접근하도록 모자보건법 관련 조항을 개정해 반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아울러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여당 간사인 권인숙 의원 역시 “위헌성을 인정받은 낙태 처벌 규정을 되살려 낸 명백한 역사적 퇴행”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낙태 자체를 반대해 온 종교계와 생명존중단체의 정부를 향한 비판도 거세진 상태.

이들은 대부분 임신 12주 이내에 낙태가 이뤄지는 만큼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할 경우 사실상 전면 허용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낙태 합법화는 생명 경시 풍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앞서 8월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법무부 정책 자문 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가 임신 주수와 상관없이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을 완전히 폐지하는 권고안을 법무부에 제출한 것을 두고 깊은 유감을 표한 바 있다. 

낙태죄 완전 폐지는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해야 하는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며, 여성의 행복과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보다 앞설 수 없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여성 임신과 출산 문제는 낙태죄 완전 폐지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을 오로지 여성에게만 책임 지우는 사회 문화를 개선해야만 해결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3월2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낙태죄 폐지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 여성 선택권 vs 태아 생명권..우선 순위 없다

낙태를 둘러싼 찬반 논쟁은 수십년간 지속되고 있다. 여성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두고 우선순위를 결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사안이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나누고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임신은 축복보다는 걱정거리가 될 수도 있는 문제다. 

때문에 낙태를 ‘죄’, ‘불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행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에 앞서 아이를 낳을 만한 국가 차원의 사회적 환경 조성과 조건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많은 이들은 “왜 여성에게만 책임을 돌리냐”라고 지적한다. 임신은 여성 혼자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여성만 사회적, 윤리적으로 질타를 받아야 하느냐는 것.

실제 10대 임신, 미혼모 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상태지만 대부분 ‘엄마’에게만 손가락질을 할 뿐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또한 원치 않는 아이를 임신한 엄마가 갓난 아기를 유기했다는 등의 뉴스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만 봐도 대부분 임신에 대한 짐은 여성들이 일방적으로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여성은 아이를 낳아도, 그렇다고 낙태를 해도 사회적으로는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여성 입장에서는 남성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는 점은 상당히 억울한 부분이다.

물론 남성에게 책임은 있지만, 여성 역시 반절의 책임은 있다. 일방적인, 무력에 의한, 성범죄 피해 등을 당한 것이 아니라면 남녀 모두에게 사랑의 결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생명은 고귀하며, 함부로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스스로의 결정, 그리고 태아를 지울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더 큰 책임이 뒤따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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