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영결식·발인..가족 및 임직원 배웅 속 수원 선영서 영면
도전과 혁신의 아이콘, 반도체·스마트폰 강국으로 이끈 뚝심
‘신경영’ 선언 후 변화 부추겨..글로벌 초일류 삼성 위상 공고히

[공공뉴스=이민경 기자] 30년 가까이 삼성을 이끌면서 한국 경제사에 큰 획을 그은 ‘재계 거목’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영면에 들었다. ‘도전과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고인의 리더십은 한국을 반도체 산업 강국으로 성장시켰으며, 스마트폰과 TV 등 세계 1위 제품을 대거 만들어내는 등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독보적인 카리스마로 수많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이 회장은 삼성의 역사 그 자체나 다름없다는 평가다. 

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진제공=삼성전자>

◆故 이건희 회장 발인..수원 선산에 영면

지난 25일 타계한 고 이건희 회장의 영결식과 발인이 28일 오전 엄수됐다.  

고인의 영결식은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암센터 지하강당에서 엄수됐다. 

상주 이재용 부회장 등 유족은 오전 7시30분께 장례식장 강당으로 향했다. 고인의 동생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그룹 사장, 조카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등도 참석했다.

영결식은 차분한 분위기 속 비공개 가족장으로 약 1시간 가량 진행됐다. 삼성 사장단과 재계 인사들은 각각 별도로 마련된 방에서 영결식을 지켜봤다.  

삼성에 따르면, 영결식은 이수빈 삼성경제연구소 회장의 약력보고와 고인의 고교 동창인 김필규 전 KPK 회장의 이건희 회장과의 추억, 추모영상 상영, 참석자 헌화의 순서로 진행됐다. 

영결식을 마친 뒤 이건희 회장과 유족, 친지 등을 태운 운구 행렬은 생전 고인의 발자취가 담긴 용산구 삼성미술관 리움과 이 회장이 생전 살던 한남동 자택, 집무실로 쓰던 이태원동 승지원(承志園) 등을 차례로 돌았다. 

이후 고인이 생전 사재를 털어 일군 화성·기흥 반도체 공장에 들러 임직원들과 마지막 이별을 고했다. 화성·기흥 반도체 공장은 이건희 회장이 1984년 기흥 삼성반도체통신 VLSI공장 준공식을 시작으로 4번의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애착이 깊던 곳이다.

이건희 회장은 장지인 경기 수원시 가족 선영에서 영원히 잠든다. 수원 가족 선영은 선대 회장을 비롯해 선대 조상들이 모신 장소다. 

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영결식이 2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서울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강당에서 비공개로 열린 가운데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유족들이 참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사진공동취재단>

◆품질·기술로 무장한 ‘뚝심’의 27년

1969년 자본금 3억3000만원으로 출범한 삼성전자는 당시 종업원 단 36명을 거느린 작은 회사였다.

그러나 50여년이 지난 현재 시가총액은 300조원, 브랜드 가치 611달러 규모의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며 삼성전자는 전세계에서 위상을 떨치고 있다. 

한국 경제 발전과 삼성의 고성장 중심에는 이건희 회장이 있다. 이 회장은 2014년 5월 자택에서 호흡곤란과 심장마비 증세로 쓰러지기 전까지 약 27년 동안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 회장 사망 이후 1987년부터 삼성그룹을 진두지휘했다.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그룹 후계자로서 경영수업을 시작한 이건희 회장은 1987년 12월1일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하기까지 21년 동안 부친으로부터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건희 경영 철학은 중 하나는 바로 정보와 기술로 무장한 ‘스피드 경영’이다.

고인은 삼성을 핵심 역량만 남겨두고 최대한 가볍게 만들었다.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의사결정 과정, 상품의 기획부터 출하까지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줄였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익은 두 배 세 배씩 늘었다.

정보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건희 회장만의 특별한 경영 방식이다.

이건희 회장의 한남동 자택에는 매일 100쪽이 넘는 분량의 문서가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그룹 내 전 세계 계열사들을 통해 수집되는 이 정보들은 국가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정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삼성의 정보 수집 능력과 치밀한 분석력, 기획력은 국정원에서조차 부러워할 정도로 전해졌다. 최고의 정보력은 삼성이 국내외 경쟁기업 및 경쟁상품의 동향을 파악하고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원동력인 셈이다. 

기술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 이건희 회장의 품질과 기술 강조는 유명하다. 고인은 생전 선진 제품과 현장 비교를 통해 기술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술은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며 21세기 생존조건”이라며 사장단에게 신기술 개발에 대해 끊임없이 채근했다.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발인이 엄수된 28일 오전 운구차량이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사진=뉴시스, 사진공동취재단>

◆글로벌 초일류 발판 마련한 ‘신경영’ 선언

또한 이병철 선대 회장은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챙기고 지시를 내리는 스타일로 유명했다면, 이건희 회장은 효율적이고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조직문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성맨’이 되기 위해 필수교육이라 일컫는 ‘천재교육’도 이 회장의 경영 방식이 베어있다. 이 회장은 ‘일등주의’ 와 ‘인재경영’의 결합을 강조해왔다. 비전을 제시하고 권한을 위임하는 전형적인 ‘지식리더’ 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건희 회장의 가장 큰 힘은 핵심을 찌르는 ‘직관’의 카리스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보자”는 화두로 시작된 이 회장 특유의 비유법은 그 후 5년 단위로 이어지면서 삼성의 변화와 개혁을 부추겼다.

이는 삼성이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다.

이후 1998년에는 “천재 한 명이 1000명, 1만 명을 먹여살리는 시대”라는 말로 인재와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평소에도 “향후 5년~10년 후를 대비해야 한다“며 경영진에게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이건희 회장의 이같은 직관과 혁신 강조는 고비마다 삼성의 방향타 역할을 해왔다.

그 결과, 산성전자는 2006년 글로벌 TV시장에서 일본 소니를 제치며 세계 1위에 올랐으며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애플을 따라잡고 1위를 달성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포함해 20여개 품목의 글로벌 1위를 일궈냈다.

뿐만 아니라 이건희 회장은 사회공헌활동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94년 출범한 삼성사회봉사단을 통해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으며, 기업으로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첨단장비를 갖춘 긴급재난 구조대를 조직해 국내외 재난 현장에서 구호활동도 전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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