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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케어러:간병·생계에 짓눌린 청년들→국가 지원 절실

[공공story] 효도의 그림자

2023. 10. 09 by 김소영 기자

공공뉴스=김소영 기자 #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다가 각기 다른 대학에 진학한 뒤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어요. 몇 년 만에 만난 그 친구는 많이 과묵해졌더라고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친구는 대학을 자퇴할 거라고 이야기 하더군요. 갑작스레 그런 말을 하길래 놀랐는데, 알고 보니 2년 전쯤 친할머니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셨다는 사정이 있었어요.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를 간병하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휴학도 길게 했다 하고요. 어머니 대신 자기를 키워주신 할머니를 외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친구의 얼굴이 굉장히 어른스러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퍼보였어요. 야간 아르바이트에 가야 한다며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물음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그럼, 너는? 네 인생은 어떻게 되는건데?’ (남·25·서울 영등포구)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노인의 날’이 있는 10월은 ‘효(孝)의 달’이다. ‘어버이를 잘 섬기는 일’이란 뜻의 효는 한국의 주요 덕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효와 관련해 최근 주목받는 사회적 의제는 바로 영 케어러(Young Carer·가족돌봄청년)다. 영 케어러는 질병이나 장애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청년을 뜻한다. 

영 케어러 문제는 그간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가 최근 20대 청년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의도적으로 방치해 사망케 한 ‘간병살인 사건’ 발생을 계기로 주목받게 됐다. 

유년기와 성장기의 돌봄역할 수행은 청소년·청년들에게 정서적이고 경제적인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까닭에 이들에 대한 국가적 지원책에 관심이 쏠린다.

# 질병·장애 가진 가족 돌보는 ‘영 케어러’

9일 국회 입법조사처의 ‘해외 영 케어러 지원 제도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영 케어러란 질병·장애·정신건강·알코올 중독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가족구성원을 직접 돌보는 아동·청소년을 의미한다.

보고서는 국가별 영 케어러의 규모가 청소년 전체 인구의 대략 5~8%라고 밝혔다. 유럽의 경우 영국의 11~18세 청소년 중 8%, 뉴질랜드 15~24세 청소년 중 8%, 스웨덴 14~16세 청소년의 7%, 이탈리아 15~24세 청소년의 7.2%, 스위스 10~15세 청소년의 7.9%, 네덜란드 13~17세 청소년의 6%가 영 케어러로 조사됐다. 

이 같은 추세를 지난해 통계청에서 발표한 ‘인구총조사-연령 및 성별 인구’의 우리나라 11~18세 청소년 인구 368만4531명에 단순 대입하면, 우리나라에도 18만4000명~29만5000명 가량의 영 케어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추정치가 나온다.

가족에 대한 돌봄은 돌봄제공자에게 유의미한 영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돌봄책임과 그 역할 수행은 공감능력, 문제해결 능력, 위기조절 능력 등을 향상시키고 탄력회복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 또, 가족을 돌보는 영 케어러들이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반면, 돌봄 책임이 매우 어린 시절부터 부여되거나 장기간 지속될 경우 돌봄제공자가 받게 되는 부정적 여파 역시 간과해선 안된다는 지적도 있다. 어린시절 시작돼 청소년기를 거쳐 장기화되는 돌봄 수고는 아동·청소년의 성장과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까닭이다.

유년 시절과 성장 시기의 돌봄역할 수행은 이들에게 신체적, 정서적, 경제적, 사회적 지장을 초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령기 연령의 영 케어러들은 지속적인 돌봄활동으로 인해 학교에 결석하는 비율이 높다. 캐나다의 한 연구에서는 영 케어러들의 학교 결석율이 10.8%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또한 대학에 재학 중인 영국 영 케어러들의 56%는 ‘가족 돌봄으로 인해 학업 수행에 지장을 받으며 학업을 끝내 완료하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잦은 결석, 낮은 학업 성취도 등 가족 돌봄에 의한 학습기회의 박탈은 미래의 고용상태와 자립능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왼쪽에서 세 번째)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9월19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청년복지정책 5대 과제 당·정 협의회’에서 취약계층 청년의 자립과 안정, 출발을 지원하는 ‘청년 복지 5대 과제’를 확정·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왼쪽에서 세 번째)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9월19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청년복지정책 5대 과제 당·정 협의회’에서 취약계층 청년의 자립과 안정, 출발을 지원하는 ‘청년 복지 5대 과제’를 확정·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일반 청년보다 삶의 만족도 낮아

그간 우리 사회에서 가족, 특히 부모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자녀가 이를 보살피는 것은 칭찬의 대상으로 여겨져왔지만, 그러나 이들에 대한 법적·정책적 인지는 전무했다. 

국내 영 케어러들의 실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첫 실태조사 결과는 올해 4월26일 발표됐다. 

보건복지부는 중증질환, 장애, 정신질환 등으로 돌봄이 필요한 가족을 돌보고 있거나 그로 인해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13~34세 청소년·청년 4만3832명을 대상으로 지난해부터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2022년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의 주당 평균 돌봄시간은 21.6시간이며 평균 돌봄기간은 46.1개월로 드러났다.

특히 돌봄 대상 가족을 가장 많이 돌보고, 전반적인 돌봄 상황에 대해 책임지는 ‘주돌봄자’ 들의 주당 평균 돌봄 시간은 32.8시간에 육박했다. 이들의 평균 돌봄기간 역시 54.7개월(4.5년)에 달했다. 

돌봄 대상 가족은 할머니(39.1%), 형제·자매(25.5%), 어머니(24.3%), 아버지(22.0%), 할아버지(22.0%) 순이었다. 돌봄 대상자의 건강상태는 중증질환(25.7%)이 가장 많았으며, 장애인(24.2%), 정신질환(21.4%), 장기요양 인정 등급(19.4%), 치매(11.7%)가 뒤를 이었다. 

국내 영 케어러들은 ▲가사 ▲함께 시간보내기 ▲병원동행·약 챙기기 ▲옷 갈아입히기·목욕 돕기·용변 및 식사 돕기 등의 자기관리 돕기와 같은 돌봄 활동을 수행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일반 청년보다 삶의 만족도가 낮고, 우울감이 높으며 미래 계획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지부는 이 같은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지난달 19일 영 케어러에 대한 지원책이 담긴 ‘젊은 한국·청년 미래를 위한 전략-청년복지 5대 과제’를 발표했다. 

그간 청년은 다른 연령층에 비해 자립이 수월하다는 인식 아래 노인·아동·장애인 위주의 기존 복지정책 대상에서도 소외된 측면이 있었는데, 이들을 위한 복지안전망이 수립된 것. 

이에 따라 정부는 영 케어러에 대해 대상자 확인-지원-관리를 포함하는 원스톱 통합지원 사업을 실시하기로 했다. 내년부터 4개 시·도를 대상으로 사업을 시범 시행하고, 향후 사업 지역과 대상자를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 가족 돌봄, ‘효심’에만 맡겨선 안돼

우선 정부는 영 케어러를 선제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학교·병원·지자체 등과 협력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또 이들 본인의 신체·정신건강 관리 및 학업·취업 준비 등을 위해 연 200만원 수준의 ‘자기돌봄비’를 신설·지급하는 방안도 마련됐다. 

아울러 정부는 전담 기관 및 인력(돌봄 코디네이터)으로 구성된 서비스 전달체계도 신설한다. 각 시범사업 지역 내 ‘청년미래센터(가칭)’를 설치하고, 전담 인력을 배치해 영 케어러들에 대한 밀착 사례관리를 제공한다는 구상이다.

각 센터당 6명씩 배치될 예정인 돌봄 코디네이터는 지원 대상자 확인부터 상담, 기존 공공·민간 복지자원 연계, 자기돌봄비 지급, 자조모임 운영 및 사후관리까지 영 케어러들에 대한 원스톱 지원 과정을 수행한다.

현수엽 복지부 인구아동정책관은 “돌봄 코디네이터가 영 케어러들이 상시 상담받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가족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공동체의 마지막 보루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영 케어러들은 묵묵히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조부모·부모들을 돌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기도 벅찬 청소년·청년들에게 가족 돌봄은 생각보다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야 할 청년들이 가족 돌봄으로 인해 학습·교우관계 기회 등을 잃게 되는 것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사회 전체의 손해이기도 하다. 가족에 대한 돌봄을 단순히 ‘효심’에만 맡겨선 안 되는 이유다. 

영 케어러들은 그간 돌봄이 필요한 가족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돼 왔다. 이젠 국가가 이들의 울타리가 돼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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