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뉴스=김소영 기자]

신인왕 거머쥔 프로복서 ‘위암3기’ 극복 후 꿈을 향한 ‘제2의 인생’
노래는 곧 삶의 의지..죽음의 경계에서도 ‘희망’은 단 하나의 무기
“환자란 생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나는 이미 환자가 아니었다”

‘위암3기’를 극복하고 오랜 꿈이었던 가수로 ‘제2의 인생’을 그려가고 있는 박종석.<사진=공공뉴스DB>

과거 대한민국이 복싱강국의 지위를 누렸던 시절, MBC 신인왕을 시작으로 전 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까지 거머쥐며 그야말로 국민 ‘쎈오빠’로 종횡무진 활약했던 박종석 씨. 건강하나는 남부러울 것 없었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건 ‘암’이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부터다. 한치 앞날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고 했던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몇 번이나 넘나든 박종석의 인생길을 들어보니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최강 복서에서 살 가망없다던 ‘위암3기’ 암환자로...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오래 간직했던 ‘가수’의 꿈을 이루고 행복한 오늘을 그려가는 중이다. 겨울냄새가 물씬 나는 12월, <공공뉴스>는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는 박종석의 덤으로 얻은 ‘제2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91년 신인왕 가뿐히 거머쥔 돌주먹..“그 시절 나는 영웅이었다!”
운동하면서도 감출 수 없었던 엔터테이너 끼..‘좀’ 놀았던 과거

“돌주먹 박종석”

지난 1982년 복싱을 시작하며 박종석이 가장 많이 듣었던 말이었다. 배고팠던 시절, 권투를 하면 부자가 될 것 같았다. 프로복서에 입문하면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은 그를 권투 인생으로 인도했고 상상은 현실이 됐다.

1990년 11월 문화체육관서 벌어진 91신인왕전 준결승에서 가볍게 상대를 제압하며 이듬해 1월 그는 12체급 신인왕에 이름을 올렸다.

“연예인이 부럽지 않았어요. 그 시절 권투는 남자들의 로망이었죠. 그야말로 권투 전성시대였어요. 가는 곳 마다 팬들이 따라다녔고 환호와 박수 속에 나는 늘 영웅이었죠”

하지만 복싱선수로서 생명력은 그 노력에 비해 그리 길지 않았다. 1994년 선수의 자질보다 흥행의 도구로 부추기는 사람들도 서서히 경계하게 될즈음, 그는 은퇴를 선언한다.

권투만 해서는 밥 먹기조차 힘들었던 현실 속에 박종석은 프로권투 선수 시절에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연기, 밤무대 MC부터 노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병행했다.

사실 박종석은 일찌감치 예능인으로 자질을 보여왔다. 현대드라마학원 2기 수료생인 그는 KBS2 TV 일일드라마 <가족> 등에 출연하며 연기자로도 활동했을 만큼, 권투 만큼이나 연예계 생활을 갈망했다.

그래서인지 대개 프로권투 선수로 은퇴하면 지도자의 길을 걷거나 프로모터로 활동하던 게 다반사였던 시절, 박종석은 연예기획사를 설립하고 클럽을 운영하는 등 여느 선수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타고난 그의 ‘끼’를 발판삼아 공식적으로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딘 순간이었다.

지난 1982년 복싱을 시작한 박종석은 91년 신인왕을 가뿐히 거머쥐며 ‘돌주먹’으로 승승장구 했다.

잘나가던 사업 IMF로 한순간 나락으로, 부도 또 부도
스트레스로만 알고 소화제만 4년째, 2013년 그 어느날..

물 만난 고기처럼 ‘끼’를 살린 그의 사업은 꽤 잘나갔다. 톡톡튀는 아이디어는 손님들 눈과 귀를 사로잡았고 스스로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절로 흥이 났다.

그러나 그 재미는 얼마가지 않았다. 동종 업종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서서히 하향길을 걷기 시작했고 IMF를 맞으며 급기야 몇차례 부도를 맞아가며 손대는 사업마다 줄줄이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몇 년을 맘고생 속에 살아갔던 탓일까. 박종석은 예민해진 신경과 잦은 소화장애를 겪으며 4년여 동안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고.

2013년 여름,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마치고 귀가길을 재촉하던 박종석은 여느때와는 다른 극심한 복통에 인근 병원을 찾았다.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복통이었지만, 그날 만큼은 참기 힘들 정도의 극심한 통증으로 결국 응급실을 찾았던 것.

“진찰을 마친 후 의사와 대면했는데 선뜻 말문을 열지 못하더라구요.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해요”

‘뭔가 제대로 탈이 났구나’란 묘한 직감과 함께 참다 못해 의사에게 뚝 던진 한마디.

“왜..? 암이예요??”
그러자 돌아오는 한 마디.
“네..위암3기 입니다”

건강 하나는 자신하던 프로복서 박종석 인생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바로 서울에 위치한 한 대학병원에서 암수술을 진행했다.

“남들은 링거를 꽂고 환자 침상에 누워 수술실로 끌려가잖아요. 그런데 저는 내 손으로 링거병을 들고 스스로 걸어서 수술실을 들어갔어요. 가망없다는 암환자가 말이죠.. 주치의도 그렇고 간호원들도 다들 놀랐죠. 웃긴건요 그렇게 수술대에 눕는데 남들은 춥고 무섭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너무 편하고 포근한거에요”

하지만 그의 수술은 그리 포근하지 못했다. 막상 수술을 시작하려고 개복(開腹)하자, 위에서 전이된 암세포가 식도까지 침투된 상황. 결국 그는 위 전체를 드러내고 식도 역시 2.2cm를 잘라낸 후 남은 식도에 소장을 직접 잇는 대수술을 받게 됐다.

이렇게 당초 2시간30분정도로 예상됐던 수술은 무려 10시간이 넘어서야 끝낼 수 있었다.

“그땐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죠. 병원에서도 며칠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그러더군요. 그러나 이미 암이 한차례 전이가 된 상황에서 위 전체를 드러내는 수술을 받았기에 사실상 예후가 좋진 않았죠”

스트레스로만 알고 소화제만 4년째 복용하던 박종석은 2013년 위암3기 판정을 받고 긴 투병에 들어간다.<사진=공공뉴스DB>

위 전체 드러내고 해골로..복싱 챔피언 물컵조차 들지못해
‘살기 위한 몸부림’ 대신 ‘편한 죽음 택하자’ 생각을 바꾸니

수술 전 80kg이 넘었던 몸무게는 고작 몇 달새 50kg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그리고 프로복싱 동양챔피언까지 지냈던 다부졌던 몸은 순식간 칠순 노인의 몸이 돼 버렸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컵을 들 힘조차도 없는거에요. 몇분에 거쳐 겨우 컵을 들어 물 한모금 마시고 손을 보면 컵의 손잡이에 눌린 자욱이 그대로 있을 정도였으니까..아마 그때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위가 없었기 때문에 당초 물 한 모금 넘기는 것도 그에겐 큰 고통이었다. 어쩌다 먹게 되면 그대로 토하기 일쑤. 자신의 아픔은 그나마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가족들과 또 지인들을 바라보는 고통이란 그 어떤 말로 표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스스로가 그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존재’라고 생각되자 견딜 수 없었다.

“말그대로 ‘한주먹’하며 온 동네 무서울 것 없이 누비고 다녔던 내가 물 컵도 내 맘대로 들 수 없게 됐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먹는 것, 입는 것, 싸는 것 그 어떤 것도 남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있는게 단 한 가지도 없었죠”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마음 먹은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하루는 영동대교를 건너고 있는데 이상해서 수술 부위를 보니 피가 줄줄 흐르고 있더군요. 그대로 차를 멈추고 그곳에서 뛰어내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 항암치료도 거부했다. 모든게 조심스러웠던 ‘살기 위한 몸부림’ 대신 사는날 까지는 그저 하고 싶은 거 막 하고 사는 ‘편한 죽음’을 택하자고 맘먹었다.

박종석은 제일 먼저 운동을 시작했다.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운동을 한다는게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지만,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굳은 의지로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을 그렇게 견뎌냈다.

스스로 ‘인복’이 좋다고 말하는 박종석. 방송인 허참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전한다.

신이 내린 몸, 드디어 삶의 의지를 찾다
“노래로 희망을 전하는 가수 되고파”

모두가 가망없다던 위암3기 대수술을 받은지도 벌써 햇수로 5년. 그 동안 재발도 없었고, 내년 7월은 암환자들에겐 소위 ‘완치 판정’을 내린다는 딱 만5년이 되는 날이다.

걸음마부터 시작한 운동은 이제 그가 전성기 시절 그때와 견주어도 될 만큼 정상 체력, 아니 그 이상의 상태로 돌려놓았다.

위가 없는데 음식은 들어가냐고? 아주 잘 들어간단다. 술, 담배만 빼고 나머지 음식은 없어서 못 먹을지경. 이제는 하루 꼬박 2~3시간 운동하는 건 중요한 일과다. 이 모든게 2년여 동안 뼈를 깎는 고통을 참고 인내하며 꾸준히 길러온 체력 덕이었다.

그리고 박종석에겐 이처럼 독한 의지를 잃지 않게 해 준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음악’이었다.

제아무리 무서울 것 없는 프로복서에게도 말기 암환자라는 현실 앞에 ‘죽음’의 두려움은 피하기 힘들었다. 박종석에게 노래란 바로 이 두려움을 잊게 해준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셈이다.

노래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자신이 암환자라는 생각은 이미 잊어버린다고.

지금은 평소 인연이 있었던 가수이자 작곡가 박진석 씨를 만나 ‘그림자 같은 사람(박재원 작곡, 박진석 작사)’과 ‘왜(박진석 작사, 작곡)’라는 자신의 노래를 받고 앨범을 내고 오랜 꿈이었던 가수로서 여정을 열심히 그려가는 중이다.

스스로가 ‘인복’이 좋다고 말하는 박종석은 그래서인지 자신의 새로운 도전에 힘과 용기를 주는 이들이 아주 많단다. 특히 넓은 마음과 깊은 배려로 많은 선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허참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님이라고.

“(다른 가수들은)노래가 히트되길 바라며, 인기를 바라며 말 그대로 ‘대중가수’로서 활동을 지향한다면 저는 그게 아니죠. 그저 내가 살기 위해 노래를 하는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 노래를 듣고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 많죠. 노래를 통해 건강한 에너지를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 싶어요”

위는 물론 식도 일부분까지 다 들어낸 상황에서 유일하게 그에게 삶의 의지를 선물했던 음악. 1라운드 공이 울리자마자 뛰쳐나가 상대를 KO시키던 신인왕 출신의 복서가 이제는 ‘살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거듭났다.

“환자란 생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나는 이미 환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박종석의 다부진 의지 속, 음악을 통해 희망을 전하는 돌주먹의 더 단단해지고 뜨거워진 ‘제2의 인생’을 기대해본다.

 

※ 故 박종석 님은 2019년 6월10일 투병생활 끝에 별세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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