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인터뷰 : 한국동서발전 인니 사망 직원 큰딸이 전하는 슬픔→분노→절망

[공공뉴스=이민경 기자] # 나는 미국서 지내고 있는 평범한 20대 유학생이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열심히 공부하면서 최근에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와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더 없이 완벽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인도네시아에서 날아온 연락 한 통은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한없이 자상하고 다정다감했던 아빠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아마도 이건 꿈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꿈이길 바랐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한달음에 날아간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건 혈흔이 낭자한 아빠의 숙소, 그 처참한 현장을 보자마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여러 차례 흉기에 찔린 나의 아빠, 끔찍한 사건의 주인공이 된 아빠가 홀로 겪었을 그 좁은 공간 안에서의 공포, 그리고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기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루아침 사이에 멀쩡했던 아빠를 잃은 슬픔도 잠시, 너무도 비상식적이고 냉정한 현실은 내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 전쟁이 이렇게 오래 갈 것이라는 생각을 그땐 하지 못했다. 설마 드라마에서나 보아오던 일이 내게 일어날 것이란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던 탓일까. 죽은 사람은 있는데 어떻게, 왜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는 모른단다. 나는 아빠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고, 아빠가 30여년 간 몸 담았던 한국동서발전과 한국 외교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건 수사와 관련해 “기다려라”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사건 수사와 관련해 진척은 없다.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하고 동서발전 본사 앞에서도 아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애원해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점차 분노로 변했다. 낯선 곳에서 주검으로 돌아온 아빠에 대한 슬픔보다 회사와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화가 치미는 것. 그냥 그것 뿐이었다. 아빠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나’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이제는 덤덤할 뿐이다. 아니 어쩌면 포기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정신이 반쯤 나간 엄마를 보고 있으면 이러다간 산 사람 마저도 죽어나갈 것 같다는 공포감이 또다시 나를 괴롭힌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말이 없는 아빠이기에 그래서 나는 아빠의 죽음의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 할 말이 많아도 말 할 수 없는 아빠, 죽은 것도 서러운데 그 와중에 누군가 위를 떼어 내어 만신창이가 돼 조국을 찾은 아빠의 시신,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는 아빠를 생각하면 도대체 지금 내가 딸로서 뭘 해드릴 수 있을까 하루에 천만만번 되물어보지만 현실은 나약한 나를 비웃고만 있다. 한을 품고 죽은 이는 그 억울함에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돈다는 말이 있다.

“아빠! 도대체 지금 어디쯤 계시나요?”

인도네시아 남칼리만탄주 칼센발전소 인근에 위치한 피해자 오모(54)씨의 현지 숙소 침실 모습.<사진=피해자 딸 오지혜씨 제공>

# 꿈과 현실 : 어느날 갑자기 인도네시아서 들려온 비보 그리고 뒤바뀐 삶

한국동서발전 직원으로 인도네시아 남칼리만탄주 칼센발전소에 파견된 오모(54)씨의 사망소식이 들려온 것은 지난달 23일이다.

오씨는 1월21일 발전소 인근 동서발전 직원 사택 욕실에서 전선에 목이 매달려 숨진 채 발견됐으며, 얼굴과 몸 곳곳에 피멍과 복부 등에는 7회 이상 흉기에 찔린 흔적들이 있었다.

오씨는 동서발전과 인도네시아 현지 전력기업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프로젝트 회사(TPI: Tanjung Power Indonesia)에 2017년부터 파견돼 근무 중이었다. 오씨는 이 곳에서 발전소 시운전을 담당했다.

현지 경찰은 1차 부검 결과 오씨의 사인을 질식사로 추정했다. 목에 감긴 전깃줄이 사망 원인으로 본 것이다.

당시 현지 경찰은 오씨가 타살됐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했지만, 오씨 발견 당시 수차례 흉기에 찔린 흔적이 있었고 침대 위에 피 묻은 흉기 두 점이 방치돼 있었던 점 등을 들어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청와대 국민청원에 유족 측은 동서발전과 인도네시아 현지 한국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속 직원과 자국민의 사망과 관련해 이들이 모두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며 국민적 관심을 호소하기도 했다.

특히 동서발전 측은 유가족에게 오씨의 죽음과 관련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물론, 조용히 넘어가는 것에 급급해 조속히 장례를 치를 것을 종용했다는 주장도 나와 논란이 커진 바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씨의 시신이 21일 한국으로 운구됐고, 우리 측 경찰 수사지원팀이 17일부터 현지에 파견되면서 조금이나마 수사가 속도를 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모든 일처리가 회사와 정부의 선제적 움직임보다는 유족 측의 끊임없는 호소와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유족 측은 여전히 울분을 토해냈다.

인도네시아에서 피살된 한국동서발전 직원 오모씨의 큰딸 오지혜씨는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울산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동서발전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지혜씨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며 공조수사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조속히 밝힐 것을 촉구했다. <사진=피해자 딸 오지혜씨 제공>

# 의지와 분노 : 해결 없는 피살 사건 어느덧 한 달..기약 없는 ‘기다림’

‘동서발전 직원 인도네시아 피살 사건’이 발생한 지 꼬박 한 달이 지난 지난 22일, <공공뉴스>는 서울 서대문구 모처에서 오씨의 큰딸 오지혜씨를 만났다.

왜소한 체구에 상당히 앳되면서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 지혜씨의 첫 인상이었다.

국내도 아닌 인도네시아 오지에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들려온 지 벌써 한 달. 지혜씨는 슬픔보다는 이제는 어느 정도 담담해진 모습이었다.

오씨 사망사건과 관련해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인도네시아 현지 경찰의 1차 부검에서 사인이 질식사로 추정된다는 것이 전부다.

사건 현장에서 오씨의 발 크기보다 3cm 정도 작은 피 묻은 족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시신 발견 당시 뒷문이 열려있었던 점 등 타살 정황이 짙은 상황이지만, 현지 경찰은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하염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지만, 35년간 회사를 위해 일해 온 직원이 타지에서 사망을 했는데 회사와 외교부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수사기관을)를 믿어달라”는 말 뿐이었다.

“사건 발생 후 2주 동안 동서발전 측에선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유족들만 분주할 뿐이었어요. 우리가 먼저 의문점을 제시하거나 사건과 관련해 공조수사 요청 등을 하지 않으면 회사는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았어요. 아빠의 죽음과 관련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죠”

“주 인도네시아 대사관 영사도 전혀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저희가 하는 말을 인도네시아 경찰에게 전하는 역할밖에 안 됐죠. 자국민이 타국에서 사망한 사건을 함께 풀어나가야 하지만 손놓고 있는 느낌이었고, 우리나라 외교부가 힘이 없다고 절실히 느꼈습니다”

지혜씨는 아빠 사망 직후 청와대 앞과 울산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동서발전 본사 앞에서 수차례 시위를 벌였다.

그가 거리로까지 나선 이유는 억울하게 숨을 거둔 아빠의 한을 풀기 위함도 있지만, 공기업 직원이 해외 파견 중 피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당했음에도 정부와 회사가 사건 처리에 적극적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다.

지난달 23일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다음날 급히 귀국한 지혜씨는 입국하자마자 외교부 해외안전지킴센터를 찾았다. 그리고 아빠 사망 사건과 관련해 한국 경찰과의 공조수사를 요청했지만 “안 된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그럼 검시관이라도 인도네시아에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 마저도 어렵다는 말 뿐이었다.

해외안전지킴센터는 해외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를 24시간 대응하는 ‘콘트롤 타워’로 불린다. 해외에서 사건 발생이 증가함에 따라 외교부가 해외에 있는 재외국민보호를 위해 지난해 5월30일 출범된 정부 기관. 지혜씨가 입국하자마자 해외안전지킴센터를 찾아간 이유다.

한국동서발전 직원 오씨가 사망한 채 발견된 인도네시아 현지 숙소. 바닥에 피가 낭자한 모습이 당시 사건의 참혹함을 짐작케 하고 있다. <사진=피해자 딸 오지혜씨 제공>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거절’뿐 이었다. 물론 외교부도 절차라는 게 있기 때문에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 측 동의 없이 이뤄질 수 없다는 점을 알고는 있지만 정부의 이 같은 단호한 답변에 지혜씨는 ‘개인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라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혜씨는 이 같은 사정을 동서발전 측에 전했다. 그제서야 외교부는 인터폴을 통해 인도네시아 경찰에 공조수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 같은 소식이 SBS 방송을 통해 보도된 후 주 인도네시아 대사는 현지 경찰청장을 면담해 한국 측의 수사 참여를 요청했고 이후 17일 한국 경찰 수사지원팀이 현지에 파견됐다.

이처럼 지혜씨는 정부와 회사 측이 먼저 나서서 사건을 처리해야 하지만 유족 측의 요구가 없으면 사건 처리에 대한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유족 마음만 급할 뿐 외교부나 회사는 본인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회사는 ‘우리 가족’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실상 대우는 그렇지 못하고 어떤 것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지 않다는 게 가장 문제라고 생각해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오씨는 아직까지 장례 치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 한국으로 운구된 그는 25일 2차 부검이 예정돼 있다.

지혜씨는 “재부검은 고인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인데 그렇게 해서라도 하루 빨리 증거를 찾아 아빠의 한을 풀어 드리고 싶다”고 했다.

충격적인 것은 인도네시아에서 부검을 진행한 후 오씨의 ‘위’를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 유족 측이 강하게 항의한 끝 뒤늦게 오씨의 위를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 외교부 측은 “현지 법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만 유족에게 되풀이했다고.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해외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한국 사람들이 해외에 있으면 지켜줘야 하지만 그런 부분이 상당히 부족하다고 느꼈죠. 계속해서 문제가 생겨도 형식적인 말, 원론적인 말만 늘어놓기 바쁘고 고쳐지지 않는 것 같아요”

한국동서발전 직원 오씨가 사망한 인도네시아 현지 숙소에서 발견된 오씨의 발보다 3cm 정도 작은 피묻은 족적. <사진=피해자 딸 오지혜씨 제공>

# 후회와 그리움 : 가족과 노래방 가기 좋아했던 자상했던 아빠, 이제는 ‘추억’

고인은 동서발전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면서 발전기가 다 지어진 후 시운전을 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에 파견되기 전 필리핀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고, 국내에서도 춘천에 파견 나가 경험과 커리어를 쌓았다.

오씨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동안 회사 직원들과 현지 주민들에게 ‘항상 웃고 다니는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필리핀에 있을 때에도 부하직원들과 친화적인 분이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인도네시아에서도 원한관계가 없었고 한국인들은 물론 현지 직원들, 주민들과도 친하게 지내셨다 주변분들이 말씀하셨어요. 제가 사건 현장에 갔을 때 직원들도 ‘정말 좋은 사람인데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겠다’며 가슴아파 하셨어요”

또한 오씨는 무엇보다 경험을 중요시 했고, 그 누구보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열정을 쏟아왔다.

“아빠는 인도네시아 현장에서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학교를 빠지고 가족여행을 갈 정도로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 자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분이고 도전의식이 강하셨죠. 퇴직을 하신 후에도 지금까지 본인의 경험을 통해 사기업에서도 일을 하고 싶다는 말도 평소 자주 하셨을 만큼 아빠는 본인 일을 사랑하셨고 성취감도 크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오씨의 마지막 일터는 인도네시아가 되고 말았다. 지혜씨는 돌아가신 아빠를 회상하며 “이번에 인도네시아에 가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며 울먹였다.

자신의 일에 온 열정을 쏟으면서도 가정적이고 부끄럽지 않은 아빠, 남편으로 살아왔던 까닭에 유족들의 상심은 더욱 컸다.

특히 큰딸인 지혜씨는 아빠의 부재에 더 큰 슬픔을 토로했다. 고인은 일 때문에, 지혜씨는 학업 때문에 각각 해외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

“미국에서 아빠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믿겨지지 않았어요. 머리에 망치를 맞았다면 아마 그런 기분일 거에요. 머리가 띵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죠. 사실 지금도 믿기지 않아요. 제가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빠를 뵙지 못한지 3년 정도 돼요. 그동안 화상통화로만 아빠 얼굴을 봤는데 갑자기 이렇게 떠나셔서..”

오씨는 슬하에 있는 두 딸과 평소 노래방을 가거나 야식에 간단한 술 한잔 기울이는 것을 좋아하는 다정다감한 평범한 아빠였다. 두 딸이 어릴 때에는 전국 방방곡곡 여행을 다니기도 했고, 얼마 전에는 딸들과 함께 여행 계획을 짜서 같이 다녀보자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영원히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고야 말았다.

숨진 오씨의 시신을 모셔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 반자르마신의 한 병원 안치실 앞에 꽃바구니가 놓여있는 모습. <사진=피해자 딸 오지혜씨 제공>

“아빠는 또 엄마에게도 모든 것을 맞추는 사람이었어요. 관절이 약한 엄마를 위해 설거지, 분리수거, 청소 등 집안일을 다 하셨고 엄마와 두 분이서 여행도 많이 다니셨죠. 연락도 매일 하시고 엄청 가정적인 분이셨어요”

지혜씨에게 아빠는 ‘강한 사람’, ‘결혼하고 싶은 남자’였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는 물론, 매사에 긍정적이면서 일도 열심히 하는 아빠의 모습을 이상형으로 꼽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더욱이 올해 12월 결혼을 앞둔 지혜씨에게 아빠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빠와 같은 사람을 만나 남 부러울 것 없는 미래를 꿈꿔왔을 지혜씨와 딸의 결혼식을 바라보며 아쉽지만 딸의 행복에 미소를 전했을 아빠.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아빠의 미소에 지혜씨의 마음은 더욱 먹먹하기만 하다.

“아빠가 너무 착해서, 우리랑 너무 친해서 빨리 데려가신 것 같아요. 조금더 천천히 가셨으면 좋았을텐데.. 앞으로 할게 너무 많고, 동생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해줄게 정말 많은데, 힘들게 일만 하시다가 가셔서 미안하고 죄송하고 후회만 남아요. 이렇게 허무하게 가실 줄 알았다면 진작에 많은 것을 해드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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