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매티리얼즈 전략, 자금 투자 가능성에 의문
디스플레이도 매각 의지..오너 일가 경영 의지 식었나

[공공뉴스=임혜현 기자] 대기업 집단 지정 해결책과 미래성장 사이의 갈림길. 일진그룹이 기로에 서 있다.

대기업 집단 지정 반년만에 주요 계열사 매각에 속도를 내고 있는 까닭이다. 동박업체 일진머티리얼즈가 롯데와 매각 계약을 체결했고, 웨이퍼와스마트폰용 터치스크린 패널을 다루는 일진디스플레이도 매각이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이탈(매각) 후 회사의 성장 동력원을 새롭게 확보하게 될 방안이다. 이미 승계가 대략 완성된 터라 그룹이 흔들릴 수 있는 악재로 작용할 것은 아니지만, 오너 일가가 경영에 흥미를 잃은 게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은 해결해야 할 숙제로 꼽힌다.

일진그룹은 1940년생인 허진규 회장에 이어 장남 허정석 일진홀딩스 부회장(1969년생), 차남 허재명 일진머티리얼즈 의장(1971년생) 등이 경영에 참여해 왔다. 아들들 외에도 첫째 딸 허세경씨는 일진반도체를, 둘째 딸 허승은 씨는 일진자동차를 거느리고 있다.

다만 일진반도체와 일진자동차는 수년째 영업적자가 이어지고 있어 그룹 가치의 본류 판단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평이 있다.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허재명 일진머티리얼즈 의장 <사진=뉴시스, 일진머티리얼즈>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허재명 일진머티리얼즈 의장 <사진=뉴시스, 일진머티리얼즈>

일진머티리얼즈, 좋은 값 받았다지만..그룹 미래 전략엔 공백

24일 롯데케미칼에 따르면, 지난 11일 미국법인(미국 내 배터리 소재 지주, LBM)을 통해 허재명 일진머티리얼즈 이사회 의장과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했다.

LBM는 일진머티리얼즈 주식(2457만8512주)과 아이엠지테크놀로지 주식(506만4829주)을 2조7000억원에 인수한다. 아이엠지테크놀로지는 일진머티리얼즈 해외 자회사의 콘트럴타워격인 곳이다.

허 의장은 일진머티리얼즈의 보유 주식 전량과 경영권을 양도하고, 아이엠지테크놀로지는 보통주식에 대한 신주인수권을 롯데배터리에 양도한다. 거래 종결일은 내년 2월이다.

롯데그룹은 ‘전동화 전환(electrification)’에 따라 배터리 소재 사업을 그룹의 핵심 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일진머리리얼즈를 사들이면서 경쟁력을 본격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허 의장이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53.3% 등을 위와 같은 가격에 넘기게 되면, 지분 매입 및 증여 비용에 비해 상당한 차익을 얻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나온 거래가를 기준으로 하면 허 의장이 대주주 양도차익에 대한 과세율(25%)과 주민세(10%), 증권거래세(0.23%) 등 세금을 약 6000억원 내야 할 것으로 산업계에서는 추산하고 있다. 자문 수수료와 거래 비용 등을 빼더라도 허 의장은 1조5000억원 가까운 돈을 손에 쥘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같은 매각이 일진그룹 차원의 이벤트가 아닌 허 의장 개인의 ‘현금부자 1인 탄생’ 스토리로 끝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일진머티리얼즈는 1978년 일본이 독점하고 있던 동박 개발에 뛰어들어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했다. 처음 매각 가능성설이 나돌 때만 해도 산업계에서는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다. 스페인과 미국 공장 건설을 통해 2027년까지 생산량을 23만톤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었기 때문.

이를 바탕으로 오너 일가가 애착을 갖고 운영을 계속할 것으로 보는 기류가 강했던 것. 하지만 허 의장의 매각 결심으로 이 같은 추정은 결국 틀린 셈이 됐다. 

일진디스플레이 매각은 의지가 강하지만 글로벌 경제 상황상 여의치 않은것으로 알려진다. 일진디스플레이는 허진규 회장이 현재 직접 지배력을 갖고 있는 유일한 상장사이다. 

일진디스플레이는 시장이 침체되면서 3년 연속 적자를 냈다. 올해 상반기 11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면서 흑자 전환했지만, 영업이익률이 아직 낮다(1.44% 수준).

글로벌 불경기인 데다, 부채비율 등 재무상태와 업황 문제 때문에 일진디스플레이를 인수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곳이 없다는 풀이가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매각은 그룹 전체적인 구도에서 대기업 집단 지정 부작용을 피하려 드는 선택지라는 풀이도 나온 바 있다. 주요 계열사를 매각하거나 계열분리하는 식의 외형 축소를 해서 대기업 집단 족쇄를 벗으려 드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마침 롯데가 미래성장을 위해 배터리 사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이곳을 탐냈으니, 가장 좋은 값을 받은 윈윈 아니냐는 해석도 뒤따랐다. 다만 이것이 완벽한 답이 될 수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매각 카드 던진 남양유업 연상 비판 피하기 어려워

우선 일진디스플레이 매각 추진 부분이다. 허진규 회장은 올해로 80세가 넘은 고령이다. 더 가지고 있어도 업황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과, 현재는 팔기에 적당치 않은 시점이므로 나중을 기약해야 한다는 시각이 엇갈린다.

후자의 입장에서는 경쟁력 강화를 통해 재도약의 기회가 오지 않겠느냐는 점에도 무게를 싣는다.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에 적용하는 경량화 터치 솔루션, 지문인식, 3차원 터치 솔루션 등의 개발을 추진한 것과  경쟁력이 낮은 평택공장 가동을 줄이고 베트남 공장 생산을 늘려 수익성을 높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점 등도 고무적이라는 평가다.

허 회장의 나이를 고려하더라도 불가피하게 손을 떼는 것인지, 오너 일가가 경영에 열의를 잃은 것 아닌지 해석 혼선이 남는 셈이다.

여기에 일진머티리얼즈의 경우, 최근 뒷말이 불거지고 있는 분위기. 허 회장은 장남인 허정석 부회장에게 일진홀딩스와 일진전기를, 차남인 허재명 의장에겐 일진머티리얼즈를 물려 줬으며 사실상 승계 작업이 끝났다. 

이런 구도를 놓고 더 많은 경영권을 넘겨받은 건 장남이라는 해석이 처음엔 당연시 됐다. 전기와 홀딩스 때문에 그룹 주요 계열사 지분을 상당 부분 갖고 있는 셈이라는 평가가 나온 것. 반면 차남인 허재명 의장은 소그룹에 해당하는 일진소재산업(현 일진머티리얼즈) 경영만을 맡았다는 평가가 우세했다.

다만 허 의장의 경영 성과로 일진머티리얼즈의 중요성이 커지며 역전이 이뤄졌다.  경영 성과 못지 않게 전기차 시장이 본격 개화한 2010년대 후반부터 2차전지 고객사 거래 물량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매출액과 영업이익 규모가 커진 운도 작용했다.

어쨌든 지분을 매각하더라도 이 자금이 그룹 차세대 미래 먹거리를 찾는 데 활용된다면 좋겠지만, 지금 구도로는 이미 장남 계열과 차남 계열이 서로 정리된 셈이나 다름없어서 굳이 투자 요인이 없다는 의문을 내놓는 이도 있다.

이렇게 보면, 장남 허정석 부회장이 ‘수소차’ 시장 공략으로 제2의 도약을 꾀하겠다는 전략 등에는 보탬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일진그룹은 2011년부터 일진복합소재(현 일진하이솔루스)를 통해 차량용 수소탱크 제작 및 판매 사업을 영위했다. 일진하이솔루스는 현대차의 넥쏘, 수소 버스 등에 수소연료탱크를 공급하고 있다.

또한 일진그룹은 바이오산업도 육성하고 있다. 그룹이 투자한 캐나다 제약회사 오리니아의 난치병 루프스신염 치료제가 지난해 미국 식품의약안전청(FDA) 승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언론 등을 통해 허 의장이 딜 완료 후 싱가포르로 이주, 특히 그 이후 개인사업에 나설 것이라 알려진 가운데 이를 풀이하면 매각 작업은 새로운 전기를 그룹에 마련하기 보다 오너 일가의 경영 열의가 식어가는 엑시트 상황이라는 우려로 귀결된다. 이미 남양유업에서 홍원식 회장이 일거에 손을 떼어버린 전적을 떠올리는 루머인 셈이다.

일진매터리얼즈 매각 이후 여러 문제에 대한 그룹의 입장 답변은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본지 역시 이 부분에 대한 여러 의문점을 확인하기 위해 수차례 일진그룹 측에 연락을 취했으나 확인 답변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일진그룹 안팎의 시끄러운 상황을 기우로 치부하는 게 타당하겠지만, 연이은 매각 문제와 싱가포르 이주설은 기술력으로 승부해 온 한 그룹을 안타깝게 보는 점에서 걸러들을 만한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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