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자 비극:영화 ‘다음 소희’ 콜센터ing→제도 개선 시급

[공공뉴스=김수연 기자] # 제가 대학생이었던 시절, 어떤 자동차 리스 회사의 콜센터에서 한 달 정도 단기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커다란 사무실에서 30여명의 직원들이 쉴 새 없이 고객의 전화를 받고, 저는 그 한 켠에서 고객들의 신청서를 스캔하는 업무를 했죠. 콜센터 직원들은 여자가 대부분이었고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줘서 저도 잘 따랐는데요. 당시 어린 제가 보기에도 고객응대 업무는 꽤 어려워 보였어요. 고객들의 다양한 요청에 순간적으로 잘 대처해야 하고, 상대로부터 어떤 말을 듣던 친절한 목소리 톤을 유지해야 했거든요. 굉장한 자기 절제력과 인내심이 필요해 보였어요. 직원들 중에는 남직원도 한 명 있었는데, 소위 ‘진상’ 고객들을 최종적으로 상대하는 역할을 맡는 듯 했어요. 항상 표정이 굳어있고 스트레스가 심해 보였죠. 어느 날은 그 남직원 분이 수화기에 대고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더군요. 그리고는 수화기를 전화기 몸통에 세게 두어 번 내리쳤어요. 쾅쾅 소리가 날 정도로 말이에요. 씩씩거리며 사무실을 떠나는 남직원을 바라보고 있으니 제 옆자리 직원이 저에게 조용히 말했어요. “가끔 저래” 라고요. 나머지 직원들은 그 남직원을 잠시 바라보더니, 곧 자기 업무를 시작했어요.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장면은 제 기억속에 남아있습니다. 무엇이 그 남직원을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남긴 채 말이에요. (여·32·서울 마포구 염리동)

지난 2021년 10월 서울 중구 파이낸스 센터 앞에서 열린 ‘코로나19 시기 폭증하는 콜, 정부는 콜센터 노동자들의 절규를 들으라’ 기자회견에서 노동자들이 벗어던진 헤드셋이 땅에 떨어져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콜센터 노동자의 현실을 그려낸 영화 ‘다음 소희’가 입소문을 타고 조용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어두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27일 기준 영화는 누적관객수 8만명을 돌파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실업계 교육 현장의 모순과 우리 사회 감정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영화가 노동계와 정치권의 주목을 받으며 감정 노동자, 특히 콜센터 근로자들의 노동 현실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 콜센터 노동자 현실 그린 ‘다음 소희’

영화 ‘다음 소희’는 2017년 전라북도 전주의 한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고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영화 최초로 지난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초청됐으며, 상영 후 7분 간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또한 제42회 프랑스 아미앵국제영화제 3관왕의 쾌거를 기록했으며, 판타지아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관객상을 받는 등 연이은 낭보를 전해 주목을 끌었다. 

영화는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인 소희(김시은 분)가 콜센터 현장실습을 나가는 전반부, 그리고 소희의 죽음을 조사하는 형사 유진(배두나 분)의 행적을 따르는 후반부로 구성됐다. 

소희는 콜센터에서 일하는 첫날부터 고객의 폭언·욕설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남성 고객으로부터 성희롱을 받는 일도 발생했다. 감정노동을 하는 동시에 가해지는 ‘실적 압박’도 그를 짓눌렀다.

영화 속 콜센터에서 소희가 수행하는 업무는 쉽지 않았다. 그는 서비스를 해지하려는 고객의 마음을 돌리고 역으로 상품을 판매해야 하는 ‘해지 방어’ 부서에서 일했다. 18살인 소희는 “서비스를 빨리 해지해달라”고 소리지르는 고객들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방어’하지 못했다.

그의 정식 퇴근 시간은 오후 6시였지만, 할당된 업무를 다 해내지 못하면서 잦은 야근에 시달렸다. 회사는 소희가 실습생이란 이유로 계약서보다 적은 월급을 줬다. 그래도 등장인물들은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뭐”라고 말하며 체념했다.

소희는 기댈 곳이 없었다. 소희는 엄마에게 “나 회사 그만두면 안 될까”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이를 못 들은 척 했다. 담임 선생님은 소희의 고통보다는 학급의 취업률에만 신경쓸 뿐이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소희가 어려운 춤 동작을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난이도가 높은 안무 탓에 소희는 실패를 거듭하지만, 수많은 연습 끝에 결국 성공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유진은 소희의 스마트폰 속에서 어려운 안무를 완벽하게 해내고 기뻐하는 소희의 영상을 발견한다. 이처럼 소희는 실패를 거듭해도 끈기있게 도전하는 밝고 당찬 아이였다. 

영화는 그런 소희가 왜 콜센터 업무에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증을 갖게 한다.

영화 ‘다음 소희’ 공식 포스터. <사진제공=네이버 영화>
영화 ‘다음 소희’ 공식 포스터. <사진제공=네이버 영화>

# 폭언 월 평균 11.6회 당하는 콜센터 노동자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2021년 8월부터 10월까지 공공·민간부문 콜센터 종사 상담 노동자 199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고객으로부터 폭언을 당한 횟수는 월 평균 11.6회, 성희롱을 당한 횟수는 월 평균 1.1회로 조사됐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는 사람은 전체 상담사의 48%에 달했으며, 자살을 생각하게 된 이유(복수응답)는 ‘경제적 어려움’과 ‘직장내 문제’가 각각 55.6%와 53.4%로 드러났다. 

업무 중 화장실 이용이 자유롭지 않다는 답변도 25.3%에 달했다. 화장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는 이유는 관리자의 승인이 불편해서라기 보다, 업무량이 많아서 화장실을 다녀올 시간이 없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이처럼 콜센터 상담 노동자들은 화장실을 다녀올 틈도 없이 바쁘게 일하며 폭언과 성희롱에 노출돼 있지만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수준의 임금을 받았다.

인권위가 2022년 발표한 ‘콜센터 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의 월 평균임금은 217만원이었다. 이는 세금공제 전 월 평균 총수령액 기준이며, 전 산업 월 평균 임금(267만원) 대비 81.2% 수준에 불과했다.

콜센터 상담원은 다시 ‘고객상담 및 모니터요원’과 ‘텔레마케터’로 구분된다. 고객상담원의 30.9%는 근무 시간의 1/4을 ‘화가 난 고객이나 환자, 학생을 다루는’ 것으로 조사됐다. 근무 시간의 절반 동안 화가 난 고객을 상대한다는 답변은 7.7%였다. 

텔레마케터의 17.2%는 근무 시간 내내 ‘화가 난 고객이나 환자, 학생을 다룬’다고 답했다. 이는 전체 직업과 대비해 매우 높은 비율이다. 특히 고객상담원의 13.7%, 텔레마케터의 20.7%는 ‘정서적으로 불안해지는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근무시간 절반 이상으로 파악됐다. 

아울러 텔레마케터는 업무 스트레스가 전체 직업에 비해 매우 높았다. 업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에 대해 ‘그렇다’(항상 그렇다~가끔 그렇다)는 응답이 ‘전체 직업’은 79.8%였지만, 텔레마케터는 95.5%에 달했다.

고객상담원 역시 텔레마케터보다 수치는 낮지만 전체 직업과 비교할 때 ‘스트레스’와 ‘감정을 숨기고 일하는 경우’의 비율이 높았다. 

또한 텔레마케터들 중에는 청력, 두통, 눈의 피로, 우울감, 불안감, 전신 피로 등이 있다는 응답이 전체 직업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두통, 우울감, 불안감 등 심리적인 문제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스트레스와 감정노동 때문으로 풀이된다.

해당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사진=뉴시스>
해당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사진=뉴시스>

# 전화기 너머 상담사, 우리와 같은 ‘사람’

‘다음 소희’의 개봉에 발맞춰 콜센터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법 개정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감정노동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협의체 ‘감정노동네트워크’의 2019년 조사에 의하면 감정노동자 2765명 중 70%는 법에 의해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가 고객의 폭언·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로부터 고객응대근로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해당 법안의 실효성이 떨어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업주가 이를 지키지 않아도 아무런 벌칙을 받지 않는 까닭. 

이같은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감정노동자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해당 개정안에는 ▲사업주의 예방조치 미시행 시 벌칙조항 신설 ▲악성 민원인의 폭언 등에 대한 삼진아웃제와 성희롱에 대한 원스트라이크 아웃제 명시적 도입 ▲3회 이상 욕설 등 악성고객에 대한 이용제한제 도입 등이 담겼다. 

이처럼 법 개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고객응대근로자를 대하는 우리의 인식부터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콜센터는 소비자가 언제 어디서든 궁금한 것을 묻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편리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고객들은 전화기 너머 편의를 제공하는 상대방이 우리처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격체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전화란 대화하는 상대방의 얼굴을 직접 마주할 수 없는 매체다. 나의 말을 듣는 상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소보다 더 잔인해진다. 

전화기 너머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이들은 기계가 아닌 우리와 같은 ‘사람’ 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전화 상담사들은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멘트로 통화를 시작한다. 이 표현이 “저도 사람입니다, 고객님”으로 들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애플리케이션·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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